지정번호 | 사적 31호 |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1 |
제작시기 | 통일신라시대 |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룬 후 나라를 더욱 굳게 지키기 위해 감은사를 짓기 시작했으며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이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의 뜻을 받들어 즉위한 이듬해(682)에 완공하고 감은사(感恩寺)라고 불렀다.
1959년 발굴조사에 의하면 중문(中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기단석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초석이 놓인 자리만 확인되고, 금당(金堂)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기단은 이중기단이다.
북쪽에는 기단석과 계단석이 남아 있다. 금당의 바닥은 방형대석을 이중으로 놓아 위쪽 대석 위에 장대석을 걸쳐놓았고
그 위에 큰 장대석을 직각으로 마치 마루를 깔 듯이 깔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았다.
이 마루 장대석 밑은 공간이 된 특수한 구조로 다른 예가 없는 것으로 보아 동해의 용(龍)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한 것 같다.
강당지(講堂址)는 정면 8칸 측면 4칸으로 일부만 발굴되어 기단석과 초석들이 거의 완전하게 지하에 보존되어 있다.
회랑(回廊)은 강당의 정면어간(正面御間)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 사지는 쌍탑식 가람으로 창건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석탑 역시 우리나라 석탑의 대종을 이루는 신라양식의 석탑 중 양식적인 완성을 보이는 가장 오랜 것이다.
1959년과 1997년의 동·서탑 해체 수리 때 삼층탑신에 마련된 사리공(舍利孔) 속에
당대를 대표하는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어 신라의 금속조각이 성당(盛唐)을 능가하고 있다.
현재 중문지(中門址), 회랑지(回廊址), 남반(南半) 및 금당지(金堂址) 대부분이 밭이 되었고,
회랑지 북반과 강당지(講堂址)는 민가에 있다.
동서로 두 탑을 세우고 이 두 석탑 사이의 중심을 지나는 남북선상에 중문과 금당, 강당을 세운 형태이다.
중문은 석탑의 남쪽에, 금당과 강당은 석탑의 북쪽에 위치한다.
회랑은 남·동·서 회랑이 확인되었고, 금당 좌우에는 동·서 회랑과 연결되는 주회랑이 있다.
이는 불국사에서도 볼 수 있는 형식이다.또한 중문의 남쪽으로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있으며,
이 석축의 바깥으로는 현재 못이 하나 남아 있다.
이를 용담이라 부르는데, 통일 신라 당시 감은사가 대종천변에 세워졌고 또 동해의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 못이 대종천과 연결되어 있고, 또 금당의 마루 밑 공간과도 연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금당터 주변에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
금당터 앞의 석재 중에는 태극무늬와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것이 눈에 띄는데 예삿돌은 아니고 금당이나 다른 건물에 쓰였던 석재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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